2006년 01월 04일
내 책상 위 미술관
내 책상 위의 미술관
고명근의 사진조각을 통해 보는 사진의 역사와 현대미술의 이해
최창희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 한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최근 흥행기록이 가장 높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관람객수는 한국 인구의 1/4에 육박하며, 서울인구수보다도 많다. 문화에 열망하는 정도가 굉장하다. 그러나 문화에 열망하는 우리의 모습은 좀더 대중화되었을 뿐이지 사실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거친 필체의 산수화나 서예 등이 집집마다 걸려있는 것은 예사였다. 거기에 주변에 그림을 그린다는 사람 하나 있으면 버리는 작품이라도 한점 달라고 하는 것은 거의 습관적으로 나누는 대화이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미술이 어렵다고 말하여도, 작품하나 소장하고 싶은 욕망은 거의 동일한 모양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손쉽게 한 것이 ‘사진’이다. 사진 기술로 인하여 루브르 박물관을 가지 않아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책이나 엽서로 우리는 소장할 수 있다. 사진이라는 복제 기술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진과 인쇄 기술로 멋진 풍경이나 유명한 명화를 매달 한점 씩 감상할 수 있는 달력으로 만든 것도 오래된 일이다. 그러니 달력은 미술관을 가지 않아도 문화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아주 훌륭한 매체인 것이다.
현대미술에 있어 사진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진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고정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작가는 3차원 풍경을 사진처럼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으로 추상화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고 하여도 틀린 표현이 아니다. 더 나아가 사진은 ‘주체(사진가)와 객체(피사체)라는 철학적인 물음’을 제기하거나, 여러 가지 꼴라주 기법으로 ‘시간과 공간이라는 복합적인 문제를 제기하기’까지 다양한 표현과 내용으로 독립적인 현대미술의 장르로서 매우 활발하게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맥락 중에 현대미술사에서 사진의 의미를 더욱 가중시키는 작품이 바로 고명근의 사진조각이다. 고명근 작가의 사진조각은 조각이라는 기존 장르에 사진이라는 매체를 결합시켜 새로운 예술형식을 제안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짬짜면(짬뽕+자장면)으로 대표되는 컨버전스(convergence)는 두 가지의 이질적 대상의 조합으로 새로운 기대효과를 가져오는데, 사진조각 역시 이러한 의미를 가져온다.
그 첫 번째가 사진이라는 2차원의 매체를 3차원으로 입체화시켰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사진은 아름다운 풍경을 오래도록 소유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으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압축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진을 다시 3차원 공간으로 입체화시켰으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 것인가.
이러한 사진이 담고 있는 공간을 3차원으로 다시 되돌리려는 작가의 시도는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2차원의 평면이 사방으로 결합된 육면체의 매우 단순한 형태로 제시될 뿐만 아니라 그 각각의 면에서 보여 지는 사진은 모두 동일한 사진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의 의미가 생성된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귀에 박힐 정도로 들었던 ‘2중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어구는 중복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작가의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동일한 사진의 단면을 2중 3중 반복하면서 이미지를 고조시킬 뿐 아니라 입체화된 이미지는 석조나 브론즈(청동 주조)보다도 견고한 입체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형태는 기하학의 기본 도형에 충실하거나 이를 변형한 형태여서 그 견고함을 배가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간과 공간의 융합으로 보다 가치 있는 의미를 가져온다. 사진은 공간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하나의 사진 속에 기록된 시간을 반복하여 만든 입체는 과거의 시간을 현재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한 이유 중에 하나는 기록으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입체화되어 현재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진이 만들어낸 입체는 그 내부에 빈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시간과 공간 모두를 복합적인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사실 사진조각이라는 작품에는 두 가지 시점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사진을 찍은 시간이며, 또 하나는 조각으로 만든 시점이다. 두 과거를 소유하고 있는 사진조각은 현재의 시간과 늘 공존한다. 여기서 더욱 재미있는 것은 최근 2~3년 사이에 보여주고 있는 투명한 재질의 사진 조각인데, 이 작품들은 시간과 공간의 융합을 더욱 투명하게 한다. 투명한 필름 사이로 보이는 공간과 앞면의 것인지 뒷면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시간 역시 끊임없이 링크, 링크되어 두 과거와 현재, 그것이 복합된 시간으로 여행하게 된다.
최근의 미디어아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첨단 산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가진 기술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디어아트에서 제시하는 개념들이 그들이 추구하는 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고명근의 사진조각도 그러하다. 고명근의 사진조각은 사진과 조각이라는 새로운 결합을 통하여 가져온 미학적 개념은 그 둘의 합 이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투명한 입체로 제시되는 사진을 통해 현재화된 가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20세기 말,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영화 ‘매트릭스’는 휴대전화를 통해 현실과 가상을 오고 가는 설정을 만들어냈었다. 영화가 먼저인지, 현실이 먼저인지는 모르나 우리는 지금 휴대전화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다. 고명근의 작품도 같은 맥락에 위치하고 있다. 사진+조각으로 2차원과 3차원을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현실과 가상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최근 작품에서 가져오는 ‘투명’에서 더욱 날개를 펼치고 있다. 투명한 것은 모든 것을 반영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인지 시간과 공간의 자유로운 여행을 한다는 미학적 개념 때문인지 작가의 작품은 현실에서 가상으로 연결하는 단자와 같다. 클릭하나로 여기저기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웹 공간처럼 '투명‘이라는 열쇠로 더욱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의 여행을 보여준다.
그 자유로운 시공간의 여행을 선사하는 작품을 매달 내 책상 위에서 감상한다는 것은 단순한 달력 그림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유명 미술관의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을 감상하러 갔을 때, 걸려있는 작품 중에 일부가 원본의 복사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알고서도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한다. 또한 좋아하는 영화의 포스터를, 멋진 영화배우의 얼굴이 찍혀있는 티셔츠를 두고 그것이 원본이 아닌 복제된 것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달력에 그려진 고명근의 작품도 그 자체가 원본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고명근의 ‘투명’한 ‘사진조각’ 달력은 사진으로 이루어진 조각을 다시 사진으로 돌려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직 오지 않은 2006년의 어느 날과 우연히 만나진 작품은 더욱 투명해져서 2006년 모두를 흡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즈음이면, 어느 누구도 내 책상 위에 미술관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하여 반문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 by | 2006/01/04 03:39 | 생각 생각 | 트랙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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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설명도 감사하구요
작품과 글을 읽다가 역시 3차원인 의상에 저 작품을 사용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봤는데요... 방법적인 것이든지..
혹시 님의 의견을 들어볼 수 있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