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에 웹진 [Aliceon]에 전시리뷰로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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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윰의 "감각의 정화" 전시 리뷰
물질적 나르시시즘에서 정신적 나르시시즘으로
이윰은 대표적인 나르시시즘 작가이다. 그녀의 나르시시즘은 아마도 타고난 미모 덕일 게다. 훤칠한 키에 날씬한 몸매는 대중스타를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을 모델로 하여 사진과 영상 속에 무수히 반복되어 보여 지는데, 미디어의 힘에 의하여 그녀는 대중스타처럼 보인다. 그래서 실제의 이윰을 보면 말을 걸고 싶고, 아는 체를 해줘야 할 것도 같다.
90년대 그녀의 작품과 전시를 많은 사람들은 선호해 주었다. 그 선호는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그 성격이 모호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여러 자극적 코드들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었는지, 비교적 그녀의 전시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때마다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해왔다. 눈은 즐겁기에, 또한 다수가 즐겨 찾기에 그녀의 작품과 전시회, 무엇보다 그녀는 스타덤에 올랐다. 꼭 대중문화와 같다.
우리는 대중문화의 스타들을 때론 경멸하면서 때론 부러워하며, 비판하면서 따라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이윰의 작품과 전시도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나르시시즘에 대해 느끼고, 평가하면서 그녀를 잘 나가는 젊은 작가에서 빼 먹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으로 평가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일까? 아니다. 나르시시즘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작품을 잘 표현해 낸 것이니, 상을 주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 그녀의 작품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있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와 도시문명에서의 삭막함, 여러 사회적인 메시지 등이 그녀의 작품의 영상과 사진, 책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애가 그러한 작품의 내용을 희석하여, 기표와 기의를 끊임없이 미끄러지게 하고 있다.
화려한 영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 것은 우리가 익숙해있던 TV 속 이미지와 흡사하여 예술성 보다는 대중성을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작품의 내용보다 두드러지는 이윰을 만날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심취되어 있어서 그녀의 얼굴, 눈, 코, 입을 서슴없이 클로즈 업 한다. 우리가 익히 보아온 영화와 CF처럼. 영화와 CF는 대중스타를 매개로 홍보한다. 주연이 누구냐에 따라 그 흥행도가 달라진다. 때론 온전히 주인공 때문에 관객동원을 성공한 예는 너무나 많다. 연기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 안에 많은 볼거리가 가득하면 되니까.
여기서 환기를 시켜보자. 이윰의 감각의 정화라는 전시를 다시 보자는데, 왜 과거의 작품을 이리도 신랄하게 평가하는 것일까. 이윰은 이번 전시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정화된 자기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훨씬 많이 솔직해지고 담백해졌다. 이전의 작품에서 나타난 어그러지는 내용과 표현이 사라지고, 정화된 자아를 표현하고 있으며 과거에 보여 졌던 어색한 표정과 행위가 사라지고 자연스레 작품 속에 위치하고 있다.
그녀의 연기가 물이 올랐다. 인물로 스타덤에 올랐던 심은하가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이, 그리고 한국의 최고 미남스타 장동건이 영화 “친구”에서 맛깔스런 사투리와 함께 비열한 친구 역을 소화해 낸 그것처럼 말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이윰의 연기는 이젠 과거와 같은 불편함은 없어졌다.
‘감각의 정화’ 전시는 두 개의 영상설치 작품을 주(主)로 진행되는데, 그 중 하나인 <깃발의 환상>은 지하 2층 공간 전부를 이용하여 전시되고 있다. 하얀 천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고, 벽 여기저기에 영상 퍼포먼스에서 사용되었던 깃발들이 설치되어 있다. 영상은 두개의 벽면에서 상영되는데, 한 면은 다른 한 면의 좌우가 바뀐 형태이며, 흑백으로 되어 있다. 영상과 함께 음향이 전시공간을 압도하는데, 그 느낌이 기이하다. 매우 생경하면서도 다소 들어본 듯한 느낌을 전달하여 노출된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한다.
<화관을 쓴 신부의 환상>도 이와 유사하다. 전시 공간 중앙 벽면 전체에 영상이 보여지고 하얀 무엇인가가 바닥에 두껍게 깔려 있다.
영상은 작은 모니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벽면 전체에 투사되어, 하나의 공간을 형성한다. 거기에 설치와 음향은 공감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여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고, 관람객은 그곳에 들어가면서 작품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는 참여와 다르다. 참여는 작품과의 소통을 이루어 상호작용을 이루어내는데, 이윰의 작품은 연극이 펼쳐지는 무대와 같다.
이러한 공감각적 영상설치로 하여금 관람객은 예전에 보았던 작품에서의 거리감은 사라졌다. 그리고 한층 자연스러워진 - 작가에 의하면 정화된- 연기로 작품에 대한 부담감도 사라졌다. 작가는 스스로가 이윰의 존재하였던 20대의 작품 활동을 ‘물질적 나르시시즘으로서의 자기애’로 평가하고 있으며, 지금은 치유와 정화라는 사역을 받고 이 땅에 예술활동을 펼치는 ‘루아흐’로 새로 태어났다고 한다. 루아흐로 정화된 작가는 하나의 여신처럼 영상 속에 등장하며, 깔라흐라는 자신만의 방언으로 음향을 제작하였다. 이는 앞서 말하였듯이 상당히 생경하면서도 어디서 본 듯한 이미지인데, 어느 영화의 장면 같기도 하다.
작품의 이미지와 음향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여신이나 요정으로 나온 갈라드리엘(Galadriel)이나 아르웬(Arwen)을 연상하게 한다. 아르웬이 프로도와 도주하던 중에 강물에 하였던 주문과 같고, 갈라드리엘이 반지의 유혹에 휩싸여 나타난 장면같기도 하다.
물질적 자기애로의 나르시스트였던 이윰은 루아흐라는 존재로 나르시시즘의 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끊임없이 주장하는 그녀의 신체는 이젠 신의 영역까지 오르게 되어, 관람객에게 영화와 같은 환타지를 제공한다. 그녀 스스로가 이윰 시절의 작품을 평가한 내용 그대로 그녀는 루아흐로서 업그레이드 된 연기를 하고 있다. 과거의 작품에서 그녀가 직접 준비한다는 시놉시스라는 작품의 내용은 속빈 강정과 같다. 업그레이드 된 그녀의 연기는 속빈 강정을 이젠 내용 없는 표현으로 바꾸어 놓고, 솔직하게 나레이션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가 아닌 작품으로서 기대하기 어려운 면이 바로 이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 중에 이윰과 같이 자신의 신체로 작업을 하는 멀티미디어/퍼포먼스 예술가들은 많다. 세계적인 예술가, 비토 아콘치와 오를랑이 대표적이라 하겠는데, 그들은 모두 자신의 신체에 가해를 하며 관객과 소통한다. 그러나 이윰은 관객과의 소통은 안중에도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는 듯 하다. 자신의 신체에 무참하게 매스를 들이댔던 오를랑은 “나는 나의 몸을 예술에게 바쳤다”라고 언급하였다고 하는데, 이와 반하여 이윰은 예술을 이윰에게 바치고 있다.
‘예술’이고자 하는 ‘그녀의 신체’와 ‘나르시시즘을 부정’하며 태어난 ‘루아흐’는 끊임없이 부유하는 기표들로서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숭고를 관객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한다. 그녀의 완벽에 가까운 루아흐로의 연기는 예술로 승화하기에는 2%가 부족하다.